한의원 개원
1996년 9월 30일 제 10호 학보에 게재한 내용입니다.
이른 나이에 가정을 돌보아야 했던 선생님은 낮에는 생계를 위하여 일을 하고, 밤에는 의술에 대한 독학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과정 중에 철도국에 취업하게 되고, 약 5년여의 세월을 보내시다가 6.25가 발발하자 바로 군무원에 자원(당시 37세경) 하셨다.

3년여의 전쟁 끝나자 군무원 생활을 접고 지금의 한일 한의원(후암동 소재)으로부터 100여 미터 아래에 한약방을 개업하고 본격적인 의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한의사 면허를 가진 분이 드물던 당시에 무려 7년 간에 걸쳐 12회나 되는 응시와 탈락을 거듭하다가 13회째 응시하여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당시 육순의 연세였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하던 자리도 내주었을 법한 연세에도 포기하지 않고,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신 것이다. 의지의 결정이요. 집념의 승리이다.
 
가족들의 말씀으로는 13번째 합격하신 거라는 말씀인데 수험표는 모두 11장이었다. 일부는 보관이 안된 건지 아니면 11번째 합격을 하신 것인지는 가족들조차도 잘 모르고 계셨으며, 안타깝게도 이런 내용을 가장 잘 알고 계실 사모님은 외출 중이셨고, 선생님은 기억조차 흐려서 명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응시하기 시작하여 7년만에 합격하신 것이라니 1년에 2회의 시험을 감안한다면 대략 13회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의보감을 최고의 의서로 꼽으셨던 선생님은 시험을 의식한 얄팍한 공부보다는 깊이 있는 한의학 수업을 위해 더 노력하셨으며, “합격은 의술이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셨다.”는 가족들의 설명이다.

우직하리만큼 동의보감에 대해 집착했고, 정통적인 한의학의 연마를 고집한 때문에 능력을 갖추고도 남들처럼 쉽게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고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는데, 서가의 한쪽에는 탐독하시던 동의보감이 닳고닳은 모습으로 소중히 모셔져 있었다. 펼쳐 보니 모르는 한자에 음과 훈을 세기고 주석을 달아 놓은 흔적들이 생생하다. 손 때 묻고 닳아서 없어진 책들은 읽고 또 읽어 내려간 세월과 횟수를 어림케 한다.
 
정통을 고집하신 덕택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고통을 감내 했지만 의학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쌓고 명의로서의 자리 매김에 일조 하였던 것으로 본다. 실제로 운명할 날만을 기다리다 선생님 치료로 건강을 되찾았다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고, 알고 지내는 분의 가족 중에도 선생님의 치료 덕에 오래도록 생명을 연장한 사례를 들은 바 있다. 워낙이 말씀도 없고 달리 내놓고 자랑하는 분들이 아니어서 선생님이나 가족들의 말씀을 직접 들은 바는 아니나 내과적 질환에 특히 밝았다 하며, 어떤 이들은 암 치료에 달인이셨다고 그들이 알고 지내는 지식을 보태 주기도 하였다.
 
명의로 소문이 나자 한의원 근처에는 진료를 받기 위해 먼 지방에서까지 환자들이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었고, 이들을 위해 인근엔 식당과 여관이 번창하기도 했단다. 특히 통금이 있었을 당시여서 돈을 받고 통금이 해제되기 무섭게 줄을 서 주거나, 통행금지 제도가 없어진 뒤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을 세워 주는 등 요즘으로 말하면 용역 업체들이 한의원 근처에 등장했었다니 가히 그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